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타 정치인과의 관계 (문단 편집) == [[왕징웨이]]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11929dab2f60ddda5636ad0aeee491e11a8a6bfdd88ffaa6b03b2d16024774f7.jpg|width=100%]]}}}|| || [[중산함 사건]] 직전의 [[왕징웨이]]와 [[장제스]] || 대부분의 우리 나라 사람들이라면 놀라겠지만 원래 장제스는 [[랴오중카이]], [[왕징웨이]]와 친밀하여 국민당의 온건 좌익 성향의 인물로 여겨지고 있었다. 쑨원 사후 한동안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으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장제스를 왕징웨이의 사람으로 보았다. 이후 쑨원의 비서이자 국민당의 대표적 좌익인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일어나자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함께 국민당 우파인 후한민과 쉬충즈를 모두 숙청하였다. 이렇듯 매우 돈독했던 두 사람이었지만, 장제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둘의 사이는 조금씩 틀어졌다. 이것이 1차로 폭발한 것이 [[중산함 사건]]이다. 장제스는 '자신을 납치하려는 공산주의자'들에 맞선다는 구실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 소련 고문들과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였다가 다시 풀어주었는데, 이것으로 사람들은 장제스가 좌익도 아니고 왕징웨이 똘마니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인식하게 된다. 사실상 이때부터 왕징웨이는 장제스를 자신의 위협적인 라이벌로 인식하게 되었지만, 북벌 때문에 두 사람은 일단 협력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우한과 상하이를 잇달아 점령한 이후 발생한 [[천도논쟁]]에서 두 사람은 완전히 갈라서게 되었다. 반대파들에 의한 자신의 실각을 병적으로 겁내던 장제스는 자신에게 위협적인 소련 고문 [[미하일 보로딘]]의 해임을 요구했다. 하지만 왕징웨이는 군사 독재자와 폭군의 등장을 용납할 수 없다고 오히려 장제스에게 부여된 초법적 사령관 특권을 회수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이때 장제스는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고 [[4.12 상하이 쿠데타|결국 상하이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국민당 내부의 공산당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게 된다. 상하이 쿠데타가 벌어지기 직전까지 일단은 장제스에 협조하던 왕징웨이는 당연히 경악했고,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장제스가 세운 난징 국민정부와 대립했다. [[북양군벌]] [[장쭤린]]의 공격으로 둘은 다시 일시적으로 협력하게 되었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왕징웨이는 [[펑위샹]]과 동맹을 맺어 장제스에 대응하려 했으나, 펑위샹의 배신으로 실패했다. 이후 난징 정부가 [[쑨촨팡]]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리고 우한 정부도 [[국공결렬]]을 이뤄내자 결국 왕징웨이와 장제스는 각각의 우한 정부와 난징 정부를 합치는 [[영한합작]]을 이루었지만, 둘의 대립은 끝나지 않았고,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왕징웨이가 명백히 수세였다. 특히 왕징웨이는 좋지 않은 자신의 건강을 핑계로 결정적인 정치적 공격을 받으면 매번 유럽 유람을 떠나곤 했는데, 결국 장제스의 공세에 제대로 된 대응을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왕징웨이 저격 사건|암살 기도]]로 큰 부상을 입으면서 더욱 몰락하고 말았다.] 나중에도 장제스는 자신에게 부족한 정치적 명망을, 왕징웨이는 자신이 없는 군사력을 보완하려 몇 번이나 [[장왕합작]]을 이룩하였으나, 무력을 보유한 장제스의 지분과 영향력이 왕징웨이를 압도했고, 장제스는 이를 이용해 지속적으로 왕징웨이를 견제했다.[* 왕징웨이에게 군사력은 꼭 필요한 존재였다. 때문에 장제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거나 하야해 없을 때에는 다른 군사 실력자들과 합작할 수밖에 없었다. [[중산함 사건]] 이전 광저우 국민정부 시절에는 높아지는 장제스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탄옌카이]] 등과 연대하려 했고, [[우한 국민정부]] 시절에는 [[탕성즈]]와 협력하여 부족한 군사력을 보충했다.] 때문에 왕징웨이는 명목상 높은 직위에 있으면서도 그에 걸맞는 권한을 가질 수 없었고,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는 좋을려야 좋을 수가 없었다. 이 때의 좌절과 실패경험이 추후 친일 행보를 불러왔다고 평가할 정도. 이후 [[중일전쟁]]이 터지자 왕징웨이는 중국이 사는 길은 일본에 협력하는 것뿐이라 굳게 믿고 일본에 붙어버리는 희대의 병크를 저질렀다. 이로써 그는 혁명가에서 [[한간]]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온 대륙의 적으로 떨어져 죽어도 보복을 염려해 무덤을 콘크리트와 시멘트로 철옹성같이 만들었지만 장제스는 옛 동지의 무덤을 [[부관참시|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켜]] 그에게 배신자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